전병욱 목사 - 사도행전 7장 1~16절 [당연한 이치를 곱씹다] 과정과 기다림이 인생이다.
과정과 기다림이 인생이다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6장의 내용을 잠깐 살펴보면 예루살렘 초대교회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구제라는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문제가 아니라 본질로 접근하는 것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원래 교회는 성령의 임재가 있고 난 다음에 자기를 부인했습니다.
누구도 자기 제물을 자기 것을 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없었다.
자기 부인의 삶을 살았다. 그런 얘기입니다.
그런데 처음으로 자기 주장이 드러나잖아요.
왜 우리는 안 주냐 왜 우리 파는 안 주냐 히브리파 헬라파 그래서 이거는 구제 문제가 아니고 지금 무엇인가 중심 이동이 일어났다라는 것을 감지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때 이 구제가 문제가 아니라 지금 우리에게 균열이 일어나고 있구나 뭔가 문제가 일어나고 있구나라고 하면서 사도들이 붙은 게 뭐냐 ?
우리가 하나님 중심에서 사람 중심으로 옮겨가고 있다.
신본주의에서 인본주의로 옮겨가고 있다.
그래서 그들이 결심한 게 뭐예요.
다시 하나님 중심으로 그래서 말씀을 제쳐놓고 뭐 엉뚱한 짓 하지 말자 그래서 기도와 말씀에 집중한다 그 사도들이 먼저 영적인 능력을 되찾는 길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구제 전문가를 세운 게 아니라 영성 있는 사람들을 세웠어요.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곱 집사를 세워서 맡겼습니다.
사실 이게 구제를 맡겼다라는 의미도 있지만 일꾼을 세웠다라는 거예요.
그랬더니 압도적인 은혜를 가지고 섰더니 사실은 구제 문제 이거는 중심의 문제였기 때문에 이건 뭐 눈 녹듯이 저절로 다 해결이 되었다.
그러므로 이건 하나님이 주신 축복이죠.
우리 삶 가운데도 이렇게 겉으로 보이는 눈에 드러나는 문제들이 있는데 그 문제를 통해서 진짜 우리의 본질이 본질을 깨닫게 만드는 거죠.
언제나 본질은 영적 능력입니다.
하나님 앞에 영적인 능력을 충만하게 세우면 이 구제라든지 이런 외적인 문제들은 눈 높듯이 다 사라지게 된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마디로 요약하면 문제라는 자극을 통해서 본질인 영적인 능력을 되찾게 되었다.
이게 6장의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후반부에 보면 스데반이 나오는데 이 사람 구제 전문가 아니라니까요.
행정 전문가 그런가 아니라니까요.
영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구제 얘기는 별로 안 나오고 주로 그의 능력을 얘기하고 있죠 성령과 지혜로 충만해서 사도급의 활동들을 합니다.
그래서 기사와 이적이 나타났다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그리고 핍박을 받아도 사도급으로 핍박을 받습니다.
예수님 당하는 거 똑같잖아요. 공해에서 사람들이 불러다가 그다음에 돈 주고 매수시켜서 거짓 증인 세웁니다.
그러고 난 다음에 공회라는 건 뭐예요.
즉결 처분으로 예수님 십자가에 달렸던 그거하고 똑같은 거거든요.
죽일 수도 있는 것
그러니까 사도급으로 핍박받는 게 아니라 예수님급으로 핍박을 받고 있습니다.
스데반 집사가 지금 이런 일들이 벌어지게 되었다라는 것입니다.
제사장 그룹이 지금 매도하는 내용들을 보면 그들이 붙들고자 하는 핵심적인 가치가 있어요.
두 가지거든요.
그래서 6장에서 우리가 살펴야 되는데 6장 13절을 보니까 이렇게 나옵니다.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슬러 말하기를 그 거룩한 곳이 어디겠어요.
1) 성전
2) 그다음에 율법을 거슬러 말하기를 그러니까 율법이죠.
성전과 율법
또 하나 14절에 한 번 더 나오는데 예수가 이곳을 헐고 뭘 하겠어요.
성전 그다음에 규례를 고치겠다 함이라.
규례가 뭡니까 율법 그러니까 제사장 그룹이 끝까지 붙들려고 했던 가치가 두 가지거든요.
성전이라는 가치와 율법이라는 가치~ 왜 그랬겠어요?
그것을 통해서 자기 이익을 추구하고 자기 기득권을 세우기 위해서 이때에 스데반 집사님이 중요했던 게 뭐냐 하면 이걸 기회로 삼았다라는 것입니다.
이들이 지금 본질을 떠나가지고 엉뚱하게 해석을 하고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스데반의 모든 설교를 보면 성전과 율법에 대한 오해를 정확한 본질적인 해석을 통해서 되살려주는 그런 기회로 삼았다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지금 성전에 대한 개념이 혼탁해진 경우가 있고 율법에 대해서도 헷갈릴 때가 되게 많잖아요.
스테반 집사님의 긴 설교를 통해서 도대체 진짜 본질이 뭔지 하나님 말씀하시는 게 뭔지를 깨닫는 시간이 되기를 원합니다.
요약하면 이거예요.
1. 성전의 본질은 하나님과의 만남이죠.
그래서 저는 2m으로 말하고 싶은데 첫 번째 m이 미팅이에요.
그래서 성전은 만남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건물이라든지 조직 이런 게 아니고 성전 개념이 사실 있기 전에도 똑같은 거 아니에요.
하나님 만나는 게 성전이죠.
성전 이전에 성막도 하나님 만나는 거였고 그 이전에 제단도 하나님 만나는 거였고 그러니까 성전의 기능은 만남 미팅이라는 거 이게 중요한 것이고~
2. 그다음에 율법의 본질은 무엇이겠습니까?
율법의 본질은 굳이 말하자 그러면 거룩한 사람 만드는 거예요.
사람 됨 사람 만들기 그래서 목표가 거룩한 백성입니다.
하나님의 백성 만드는 것 사람 만드는 것 그래서 율법을 통해서는 사람 만들어 가는 것 이 두 가지예요.
그래서 맨이야 맨, 미팅과 맨 성전은 미팅 이게 본질이고 율법은 맨 사람 덴 사람 만들어 감 이게 본질이라는 것입니다.
차례로 설교 내용들을 한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는 성전인데 이들은 생각할 때 성전을 건물로 생각했다는 거예요.
그래서 건물로 얼마나 화려하냐 얼마나 대단하냐 이거 뭐 하나님께서 이렇게 잘 지었기 때문에 대단하게 역사하실 것이다.
뭐 이런 식의 개념을 가져요. 지금도 요즘에도 뭐 속아가지고 교회 건물 지으면서 성전 짓는다 이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이 있잖아요.
다 똑같은 개념들입니다. 오해하고 있어요.
건물이라고 생각하거든 그거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뭐라 그래요
46년 동안 지었던 헤롯 성전 부셔버려라 내가 3년 만에 짓겠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이 성전이다.
그런 의미인데 그게 무슨 뜻이에요.
예수님 만나는 게 성전이지 뭐 딴 게 성전이냐 그런 얘기죠 그러니까 만남이 성전이다.
그
다음에 너희가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인 거 모르느냐 고린도전서 그런 말씀이 나오잖아요.
그러니까 만남이 성전이지
결국은 이렇게 건물이나 외형적인 것이 성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관심이 누가 만들었느냐 얼마나 크게 만들었느냐 뭐 이런 거에 신경을 쓴다는 거예요.
그래서 다 아는 얘기부터 시작을 합니다.
아브라함부터 아브라함은 뭐 다 아는 얘기 아니에요.
아브라함 하나님 만날 때 성전이 있었냐 그런 얘기죠 갈대아 우르~ 여기서는 메소포타미아라고 나오는데 메소포타미아에 있을 때 지금의 지금 이라크 지방이죠.
바벨론에 있을 때 거기 있을 때 하나님이 영광 가운데 만나주신 거 아니냐 그래서 여기 똑같은 개념입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있을 때 영광이 임하는 거예요.
영광이 임하는 거 똑같은 거 만남이죠.
만남 그래서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간이 중요한 게 아니라는 거죠.
너희들은 성전에서만 하나님이 만난다고 그러는데 메소포타미아에서도 하나님 만나주셨잖아 그러면 만나는 곳이 성전이지 무슨 장소가 뭐 이렇게 대수냐 건물이 뭐 대수냐
그러면서 그들이 건물에만 묶여 있는 개념들을 깨버리는 거예요.
하나님이 만나주시는 것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고 그 어디나 성전이라고 그걸 설명하고 있다라는 것입니다.
2절 읽겠습니다 시작 스데반이 이르되 여러 분 부영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포함에 있을 때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이 보세요.
하나님 만나는 곳이 메소포함에 있어도 가능한 거 아니냐 하나님 만날 때 구원이 시작되고 하나님 만날 때에 생명이 시작된다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다음에 창세기 12장 1절에 보니까 하나님이 명령하시죠 내가 살던 거 떠나가지고 내가 지시할 땅으로 가라 그때 아브라함이 했던 일이 뭐예요.
순종했죠. 그러니까 순종의 삶이 만남이 삶이라는 거예요.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날마다 날마다 순종할 때 그때 하나님을 계속 만나잖아요.
그래서 순종이 만남이다. 이렇게 또 설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순종하면서 떠날 때 떠나고 가라 할 때 가고
그 모든 과정이 하나님 만나는 과정 아니냐 그게 성년의 삶이다.
이렇게 또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3절 4절 읽겠습니다 시작 이르시되 내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내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 아브라함이 갈 때와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그의 아버지가 죽음에 하나님이 그를 가리 거기서 지금 너희 지금 사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의 과정이 또 만남이었다.
이게 성전 아니고 뭐냐 이런 거죠.
그리고 우리는 생각할 때 가나안 땅에 관심이 많잖아요.
우리 다 성경 읽을 때 그렇게 읽지 않습니까?
가나안 땅 땅이 중요하다 이렇게 얘기를 하는데 땅이라는 것은 우리가 그냥 가시적으로 들을 수 있는 얘기지 실제로는 땅 자체보다도 만남이었다는 거예요.
가나안 땅으로 옮겨가는 과정 속에서 하나님이 만나주시고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백성으로 심는 거지 가나안 땅에서 만난다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을 만나는 사람이 가나안 땅에 신겨졌다는 얘기지 그래서 가나안 땅이 하나님 백성들이 통치하는 땅이 되기를 원하는 거지 그 땅 자체에 무슨 특별한 효염이 있거나 그런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설명을 해요. 가나안 땅에 갔더니 땅 주던 그런 얘기죠 발 붙일 땅도 주지 않았다.
그리고 가나안 땅이 줬더니 땅 주지 않고 뭘 주던 약속 주지 않았느냐 약속 약속이 뭐예요.
약속과 성취의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는 거죠.
그래서 가나안 땅에서는 약속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었지 땅 아니었다.
그런 얘기예요. 약속 붙들 때 하나님 만나는 거지 뭐 땅이 있다고 만나냐 스테바 설교의 내용이 그거라니까요.
5절 읽겠습니다 시작 그러나 여기서 발 붙일 만한 땅도 유업으로 주지 아니하시고 다만 이 땅을 아직 자식도 없는 그와 그의 후손에게 소위를 주신다고 약속하셨으며 여기서 우리 자신을 한번 점검해 보는데 여러분 삶 가운데 이것저것 벌어질 때 여러분들은 기도의 응답 또는 하나님의
능력 이런 것들이 뭐가 이루어지는 걸로 자꾸만 생각을 한다고요 근데 그게 아니고 하나님의 목적은요 그 만남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를 들어서면 지금 질병 가운데 있다고 합시다 지금 병상에 있거나 그래요 거기서 하나님 만나면 여러분 성공한 인생이에요.
또 고난이 되게 많습니다 고난이 되게 많았는데 거기서 지금 하나님을 만났다고 그러면 그게 하나님 목적이라니까요.
만남이 성전의 삶이라고요 만남이 있으면 되는 거다.
그러니까 날마다 날마다 만나는 거 이제는 신약에서는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난 다음에 성령을 보내주셔서 성령께서 내 안에 내 주에 계시잖아요.
날마다 주님을 만나는 거죠. 만남이 예배고 만남이 성전이지 만나지 않는다 그러면 무슨 의미가 있느냐 뭐 그런 얘기입니다.
여러분 인생 가운데도 이렇게 생각하세요.
모든 것들을 해석을 어떻게 해야 되느냐 하나님의 만남으로 해석해야 된다니까요.
주님께서 이걸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게 하셨구나
아무리 뭐 돈 많이 벌고 아무리 출세하고 난리 친다 할지라도 하나님 만남이 없다.
그러면 여러분 실패한 인생입니다. 오늘 성경은 그걸 얘기하고 있다라는 거예요.
그래서 한 번 더 얘기하죠. 다른 땅으로 옮겼다.
다른 땅이 어디입니까 애굽 아니에요.
애굽 애굽으로 가서도 거기서 하나님께서 만나주셨다라는 거죠.
거기에 애굽 왕이 막 괴롭혔다라는 거예요.
괴롭히면 우리는 괴로움에만 초점을 맞추잖아요.
내가 뭘 잘못했다가 이 죽을 고생을 해 우리는 그러잖아요.
하나님이 인도하셔서 애굽에 갔는데 왜 애굽에서 고난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이따 이 땅으로 인도하세요.
이렇게 생각 안 들어요. 하나님이 가라고 해서 간 거 아니에요.
근데 거기에 고난이 있잖아요. 그게 무슨 뜻입니까 우리는 고난에 관심이 많지만 하나님은 만남에 있다니까요.
거기서 하나님이 너희들을 만나주셨지
그 만남입니다 만남 다른 땅에서도 얼마든지 하나님이 만나주실 수 있다.
잘 보세요. 메소포타미아에서도 하나님이 만나주셨고 가나안에서 만나주셨고 애굽에서도 만나주셨습니다.
나중에 바벨론에 가도 만나주실 거고 어디 가든지 만나주신다는 거죠.
개념을 아시겠어요. 성전의 개념은 만남에 있다.
이걸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6절 다 같이 있겠습니다 시작 하나님이 또 이같이 말씀하시되 그 후손이 다른 땅에서 나그네가 되리니 그 땅 사람들이 종으로 삼아 400년 동안을 괴롭게 하리라 하시고 여기서 여러분 뭘 느끼십니까
괴로움 당했다에 초점을 맞추는 게 아니라 거기서도 하나님이 만나주셨다.
그런 거죠. 사랑해 보셨어요? 사랑하는 사람과 만나면 뭐 이렇게 분식점에서 만나도 좋죠.
순수 사랑을 얘기하는 겁니다. 여러분들 좀 인정해 주세요.
진짜 사랑하는 사람의 분식점이 만나도 좋죠.
그리고 험난한 곳에 만나도 좋죠. 근데 싫은 사람 전혀 정떨어진 사람 호텔에서 만나거나 뭐 아주 멋진 곳에서 만나 레스토랑에서 만나는 게 뭐 좋아요.
인정을 안 했지만 그게 진짜 사랑이에요. 알아요?
하나님이 지금 그 말씀을 하시고 있는 거예요.
나와 만나는 곳이 그 어디는 하늘 나라지 뭐 조건이 뭐 중요하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쭉 이끌어 가시면서 아브라함부터 만남이 성전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지금 쭉 그거를 지금 설명하고 있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들은 지금 제사한 그룹들 성전만 외치고 있지 하나님 만남이 있니 너네 지금 하나님 만나고 있니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제사하는 백성들이 하나님 만나고 있니 하나님 임재가 있니 이거 가짜 아니야
그러니까 이런 놈의 성전 제도 이거 없어져 버려야 된다 그렇게 말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생명이 있냐는 거예요. 하나님의 만남이 있어야 생명이 있잖아요.
생명이 없잖아요. 사람들이 목말라 하는 거죠.
괴로워하고 성전인 성전의 기능을 못한다는 것입니다.
왜 성전에 가봐야 하나님 만남이 없기 때문에 교회도 마찬가지죠 교회가 하나님 만남이 있어야 교회죠
성령의 임재가 있어야 교회죠 만남이 없다고 그러면 이게 무슨 사교 클럽이지 뭔 의미가 있겠어요.
그러니까 만남이 없으면서도 조직으로 운영될 수 있죠 두려움과 욕심 채워주면 사람들이 또 모이긴 모이거든요.
그게 무슨 교회냐 그런 얘기죠 언제나 하나님의 임재가 있을 때 만남이 있을 때 영광이 있고 능력이 있고 그렇다라는 것입니다.
그 사기를 보면요.
사기 중국 사기업 - 사마천의 사기를 보면 맹상군이라고 나옵니다.
거기서 이제 식객이라는 말을 씁니다.
식객이 3천 명이라고 그러죠 부잔인데 그냥 할 일 없이 먹여주는 사람이 3천 명이나 돼요.
인재죠 인재 인재 풀이 있었다는 거예요.
3천 명이 먹이고 있었는데 그중에 풍환이라고 풍환이라는 사람이 제일 인상적인데 이 사람 때문에 고사성어가 한 서너 개쯤 나왔어요.
근데 그중에 하나가 뭐였냐 하면 맹상군이 잘 나갈 때 3천 명이나 되는 식객이 있었는데 이제 제상에서 쫓겨났어요.
쫓겨났더니 3천 명이 다 떠나가 버리네 ~ 그 상처를 입죠.
여러분들도 실패를 하거나 넘어질 때 사실 실패와 넘어짐 때문에도 상처가 되지만 사람들 떠나가는 걸 보면 상처가 더 돼 아니 이럴 수가 있나 이렇게 매정하게 다 따라가 버리네 그러다가 이 풍안의 또 계략으로 다시금 또 복직이 돼요.
또 재상이 돼버렸어요. 그랬더니 그때 맹상군이 생각할 때 이런 거예요.
이 은혜도 모르는 놈들 다시 기어들어오네
그래서 이거 다 쫓아내 버려야지 그랬더니 이 풍안이 이렇게 얘기합니다.
저도 떠나야겠습니다. 왜 그러냐고 너 때문에 내가 이렇게 다시 복직됐는데 무슨 얘기냐 그랬더니 우리 주인께서는 당연한 이치를 모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당연한 이치가 뭐냐 그랬더니 예를 하나 들죠.
아침 시장에는 사람이 벅적벅적 대고 똑같은 장소인데 저녁 시장에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라는 게 썰렁하다는 거예요.
왜 그렇습니까
시장이 좋고 나쁘고의 문제가 아니라 아침 시장에는 먹을 게 많으니까 사람들이 모여드는 거고 저녁 시장에는 아무것도 없으니까 사람들이 안 보이는 거라고 이건 당연한 이치라고 당신이 힘 있고 돈 있고 할 때야 사람들이 모여들지 돈 없고 힘 없으면 떠나가는 거 보고 당연한 이치 갖고 왜 난리 치냐고 여기에 이게 되게 지혜가 있거든요.
다른 사람들이 많은 사람들은요 되지도 않는 당위 당연함 이런 거를 너무 따질 때가 되게 많아요.
무슨 얘기하면 사람은 이러이러 해야 된다
그런 거 없습니다.
사람들 사람들은요 배고프면 그렇죠 먹을 거 있는 데 오이고 채워주는 데 오고 생명인데 오게 돼 있다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원인을 이런 사람들은 다 남 탓을 하거든요.
이 배응망한 놈들 그리고 저 나쁜 사람들 그리고 발전이 없잖아요.
자기 낙망하고 깨지고 그거밖에 더 있겠습니까
근데 이거 갖고 깨달은 게 뭐예요. 자기 문제로 인식하잖아요.
내 문제 게 생명이 있으면 모이는 거고 내게 생명이 없으면 떠가는 거고 내게 능력이 있으면 모이는 거고 내게 능력이 없으면 따라가는 거고 문제는 내게 있는 거죠.
내가 능력 받아야지 내가 생명이 있어야지 그게 맹상꾼이 깨달았던 얘기 아니에요.
저는 성경에도 똑같다고 생각합니다.
교회가 그런 거예요. 뭐 사람 그 탓해요.
탓하기는 하나님의 임재가 있으면 생명이 있으면 모여들게 돼 있고 변화되게 돼 있고 생명이 있게 돼 있는 거예요.
근데 하나님의 임재도 없으면서 그렇죠 하나님의 만남도 없으면서 이 제사장 그룹들은 억지로 끌어 모으는 거 아니에요.
사람들 지금 협박에 가면서 그렇죠 뭐 이렇게 이익 줘가면서 이런 게 무슨 교회냐 뭐 그런 얘기죠 여러분들 잊지 마십시오 이것저것 따지지 말고 결국은 내 문제입니다.
보세요. 구제 문제 때문에 막 싸움이 벌어졌잖아요.
구제로 풀지 않아요. 구제로 푼다. 그러면 뭐 공정 공평 그래서 인본주의적인 방법으로 풀겠죠.
그러지 않는다고 내게 문제가 있다고 그러잖아요.
내게 문제가 있다. 똑같은 맥락 아니에요.
내가 말씀은 제쳐놓고 기도도 안 하고 말씀도 전모 안 하니까 이꼴이다.
그 자기가 능력이 생기니까 다시 모이잖아요.
7절 보니까 뭐 부흥 다시 했다며 똑같은 얘기 아니에요.
저는 이 고산의 형하고 똑같다고 생각을 해요.
스테반도 마찬가지죠 스테반이 지금 강조하는 게 그거 아니에요.
하나님의 교회라는 작고로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어야 된다 하나님 임재가 있어야 된다 얘는 지금 뭔 꼴 만드는 거냐 성전이 건물인지 아니 하나님 만날 수 있는 곳이 성전이야 그래서 역사를 추정하면서 쭉 설명하고 있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만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느냐 하나님께서 이제 아브라함에게도 알려주잖아요.
어떻게 어떻게 하라고 인생의 내용을 만들어주십니다.
제가 잘 보니까 사람들이 헛된 인생 사는 이유가 뭐냐 자기가 자기 인생을 계획하고 자기 인생을 꾸려가요 그러니까 뭐 잘 된 사람도 가끔 있지만 되게 망망쳐요 여러분 인생 자기하고 맞지도 않는 계획을 세우고 자기에게 주어진 것도 아니기 때문에 되게 헛됩니다.
헛짓하다 끝나는 게 인생이 된다고요 근데 일단 먼저 하나님 만나야 돼요 하나님을 만나면요.
하나님이 내 인생의 내용을 만들어주십니다.
뭐 하라고 그걸 사명이라고 그러거든요.
그래서 하나님이 뭐 하라고 그런 걸 해야 열매를 거두고 승리를 한다고요 교회가 할 일이 뭐예요.
하나님 만나는 거죠. 만나야 내용이 생기지 하나님 만나기 이전에는요 내용 없는 인생입니다.
다 허지다 다 끝나는 인생이에요. 그리고 우리는 그러죠 뭐 내 전성기 때 만났으면 좋겠다.
그러는데 그 뒤에도 나오지만 모세가 한번 보세요.
인생의 120년인데 제일 전성기는 가운데 토막 아니에요.
40세부터 80세 그때 아니에요. 그때 처가 살이하고 그냥 놀았어요.
아무것도 안 했어 80세 되면 인생 끝난 거 아니에요.
이제 이제 뭐 하늘나라 갈 준비나 해야 되겠다.
그런데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쓰임 받았다고 그게 무슨 얘기입니까 내용을 하나님이 채워주시고 힘도 하나님이 주시는 거예요.
그래서 잘 보면요. 내가 전성기라 그럴 때 전성기에 죄를 져요.
죄 그리고 나는 이제 끝장 난다 그럴 때 힘 다 뺐을 때
하나님께서 사명 주셔가지고 실제로 여러분 인생의 가치는 그때 다 나오는 거라고 혹시 병들었습니까 저 기회입니다.
혹시 늙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진짜 기회네 그렇죠 비참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이제 힘 빼고 계시네요.
이제 진짜 인생을 사는 거라고요
내 인생의 내용은 하나님만이 채울 수 있다는 거 잊지 마십시오.
그 이전에 해야 할 일이 뭐죠 만남의 만남 그래서 교회가 할 일은요 뭐 사명 주는 것도 아니고 뭐 어떤 표대를 향하여 이런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 만나야 돼요 하나님 만나야 하나님이 내게 인생의 내용을 채워주신다니까요.
만남입니다 만남
성전은 건물 아닙니다.
성전은 형식 이런 거 아닙니다 만남이라는 거 이 메시지 꼭 붙들고 승리하는 하나님의 종 되기를 축원합니다.
오늘도 주님 만나는 시간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또 한 가지는 율법인데 율법은 사람 만드는 거예요.
율법은 돌판에다가 뭐 개명 나오는 거 아니에요.
그런데 그 개명이 다가 아니죠. 그 계명대로 살아야 되는 거 아니에요.
그래서 성경은 계속 그러잖아요. 이게 돌판에 새기지 말고 마음판에 새기라고 예레미아서 에스겔서 또 고린도 후서 계속 그 얘기 아니에요.
이게 돌비에 세우지 말고 신비에 세우라고
그러니까 이거는 사람 되게 만드는 거죠.
율법은 결정적인 거지만 율법대로 살아가지고 율법 같은 사람을 만드는 거 그걸 하나님 백성이라고 그러는데 하나님 백성 되는 데는 시간이 걸리죠 과정이 있잖아요.
그러니까 그걸 지금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율법은 사람의 맨 사람 만드는 거예요.
율법은 말씀은 사람 만드는 게 목적이라고 사람 만드는 거 사람 됨 그래서 에이라 때 맨이라고 그랬죠 맨
출애굽기 19장에 보면 5절 6절에 신에서는 언약이 나오잖아요.
너 너의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게 하겠다.
제사장 나라가 되게 하겠다. 세 번째가 뭐예요.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겠다. 이게 목적이거든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 백성 되는 거예요.
거룩한 백성 거룩이 뭐라고 그랬습니까 다른 거 거룩한 백성 만들려고 가나안에 신겨 놨는데 똑같은 가나안하고 똑같은 백성이 됐어 그러니까
다르잖아요. 다르지 않으니까 거룩이 깨진 거죠.
그 거룩함을 잃어버린 백성이 돼 버렸다고 힘은 어디서 나와요 다음에서 나온다니까요.
남들 놀러 갈 때 다 놀러 가면 그게 뭐 똑같은 백성이지 근데 우리는 예배 드리잖아요.
다른 백성이잖아요. 거룩한 백성 다르잖아요.
남들 엎어져 잘 때 우리는 기도하잖아요.
다르잖아요. 거룩한 백성 그러니까 율법의 목적은 뭐예요.
거룩한 백성 만드는 게 목적이에요.
사람 만드는 게 목적이라니까 사람 율법의 내용이 그거 아니냐 그런 거죠.
그러니까 여러분 이렇게 생각하면 돼요 여기서 이제 두 번째 모델은 요셉을 들고 있는데 요셉의 일대기를 다 들어가지고 우리는 요셉의 환경에 관심이 많아 채색 옷을 입었다.
그다음에 구덩이에 빠졌다. 노예가 됐다.
감옥에 들어갔다. 그러다가 또 총리가 됐다.
이렇게 포지션에 되게 관심이 많다고
그런데 지금 스데반의 설교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게 뭐냐 하면 그건 니네들 관심이고 하나님 관심은 뭐냐 하면 요셉의 삶 가운데 벌어지는 모든 일들이 다 목적이 뭐냐 그를 사람 되게 만들어 가는 과정이었다.
또 하나는 만남이었다. 그거예요. 앞에 얘기 성전하고 똑같아요.
만남을 위해서 이런 일들이 벌어진 거고 사람을 만들기 위해서 이런 일이 벌어진 거다 이게 요셉의 일대기를 통해서 또 설명하고 있다라는 것입니다.
별로 어렵지 않겠죠. 여기 보세요. 우리는 형들에게 시기심 때문에 어려움 당하고 팔렸다.
이런 관심이 있잖아요. 근데 성경의 관심은 뭐예요.
하나님이 그를 만나주셨다. 함께 했다.
거기에 관심이 있다고 9절 10절 읽겠습니다 시작 여러 조상이 요셉을 시기하며 애굽에 팔았더니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셔 그 모든 환란에서 건져내사 애국왕 바로 앞에서 은총과 지혜를 주시에 바로가 그를 애국과 자기 온 집에 통치자로 세웠느니라
통치자가 된 데 우리는 관심이 많죠.
총리가 된데 근데 관심사는 뭐예요.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셔서 만나주셨다라는 거예요.
만나주셨다. 그리고 그를 사람 되게 만들었다.
우리는 관심이 엉뚱한 데 있죠 근데 하나님 관심은 총리가 목적이 아니에요.
부자가 목적이 아니에요. 건강의 목적이 아니라고요 총리가 왜 냈느냐 이렇게 굳이 설명한다고 그러면 형과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서 그런 거죠.
백성 만들기 위해서 거룩한 백성 만들기 위해서 또 11절 이하에 보니까 흉년이 왔죠.
흉년이 온 이유가 뭐예요. 흉년이 왜 왔습니까 이렇게 흉년이 와야 애굽에 가지 그 뜻이에요.
그러니까 여러분들 우리 인생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을 해석하는 법을 알겠죠.
지금은 잘 모르겠지만 내 인생의 흉년이 야 그래야 내가 있는 자리를 떠나지 아마 하나님이 여기 있는 게 뜻이 아닌가 봐
그래서 떠나는 거예요. 떠나다 보면 그래서 흉년이 있었군 이렇게 깨닫게 되는 거예요.
그렇죠 그래서 형들 만나게 하려고 흉년 때문에 만나게 하려고 하나님은 흉년도 사용하시고 질병도 사용하시고 대적도 사용하시고 실패와 고난도 다 사용하시고 이런 걸 뭐라고 그래요 섭리라고 그러잖아요.
섭리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의 평탄함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 거죠. 그게 뭐예요.
만남과 사람 됨 하나님 백성 되게 만드는 것 그런 게 하나님의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위치는 위치가 지도자 만드는 거 아닙니다.
영향력 있는 지도자 만드는 거예요. 요셉을 보세요.
그게 노예인데도 영향력이 있잖아 그게 지도자지 감옥에 들어가도 영향력 있잖아요.
그 지도자지 가울을 보세요. 유라굴로 강풍이 불 때 죄수로 배 안에 있어도 지도자잖아 영향력이 있으니까
우리는 관심이 맨날 포지션에 있다고 어느 위치냐고 위치가 뭐 중요해요 그래요 어떤 사람이요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어디 회장도 아니야 부회장을 해 부회장을 해도 영향력이 있으면요.
부회장이 되게 커 보여 근데 어떤 사람은요 회장을 몇 년 해도 있으나 반응 한 존재 누군지도 몰라 자리가 뭐 중요한지 알아요.
영향력이 중요하지
우리나라가 옛날에 그랬던 것 같아요.
누군지 기억이 여러분 나시지 어떤 사람이 감사원장이 됐어 감사원장이 난 총리보다 세 보이는 거 처음.
봤어요. 그때 영향력이에요. 영향력 지금 감사원장이 누군지 알아요.
저도 몰라요 감사하게도 모르겠어 누군지 근데 그게 중요한 거죠.
그러니까 우리 인생에서 꼭 깨달아야 될 게 뭐냐 하면은
그렇죠 이게 자리가 힘을 주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영향력이 힘을 주는 거지 요새는 보세요.
어느 곳에 있든지 문제 없이 영향을 미치잖아요.
그래서 인생에서 우리가 보통 목표라고 생각하는 건 다 소품이라니까요.
돈도 소모품이고 시간도 소모품이고 심지어 고난도 우리에게 주어진 소모품이다.
그거 써가지고 써가지고 하나님의 사람 되는 거예요.
그리고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고 그게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그거 되게 중요한 거죠.
그리고 인생 잘 보면요. 인생이라는 게 우리 뭐 자꾸 이루어야 된다고 생각하는데 뭘 이루겠어요.
과정이 인생이지 목적은 하나님이 이루시는 거고 우리는 과정 가운데 부르시는 거라고 그래서 여러분 실제로 뭐 예를 들어서 선교를 간다고 그러면 선교를 가서 이렇게 복음 증거하는 게 목적일 수도 있지만 그 가는 과정에서도 얼마나 많은 걸 느낄 수 있습니까 과정이 인생 아니에요.
우리 로마서 5장 같은 데 보니까 우리 인생 가운데 뭐 이런 게 있잖아요.
과정 속에서 인내를 배우잖아요. 과정 속에서 연단을 배우잖아요.
과정 속에서 소망을 갖잖아요. 이게 또 과정에서 있는 거지 이 결과에서 있는 건가 뭘 하다 보니까 인내심이 생기는 거야 뭘 하다 보니까 연단이 되는 거예요.
뭘 하다 보니까 소망이 생기는 거예요.
그게 인생 과정이죠. 하나님께서 그렇게 우리를 이끌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 뭘 이루는 게 아니라 지금 이렇게 같이 예배드리는 이 과정이에요.
이게 우리 인생이에요. 이 과정 가운데 사랑도 사트지 않아요.
여러분 영화 볼 때 처음과 끝만 봅니까 시작하려 시작 그리고 마지막 결론이 뭐야 죽었어 살았어 결혼했어 안 했어 그러면 끝이에요.
우리가 영화를 왜 봐요 과정을 보는 거 아니에요.
뭐 이렇게 이렇게 지지고 볶고 하다가 뭐가 되더라 과정이 재밌는 거지 인생도 과정이에요.
그래서 과정 과정이 과정 가운데서 하나님의 사람이 돼 가는 거라고 그리고 죽고 끝나는 게 아니고요 연속됐다고 그러잖아요.
여기 보니까 이러다가 다 죽었죠. 사람들 끝이 아니죠.
연속이라니까요. 우리가 아침에 깨가지고 눈 떠보니까 세상이야 그럼 예배 드리고 눈 떴더니 예수님이 웃고 계셔요 그건 천국에 온 거라고 이 연속이라고 연속 그래서 여기도 보니까 이렇게 과정 속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천국 가 딱 그 얘기죠 15 16절 있겠습니다 시작 야곱이 애굽으로 내려가 자기와 우리 조상들이 거기서 죽고 세개으로 옮겨져 아브라함이 새 하모의 자손에게서 은으로 값지고 산 무덤에 장사 되니라 이거 보세요.
다 죽었잖아요. 다 죽었다는 얘기 아니에요.
그렇죠 죽었죠. 죽고 난 다음에 끝이 아니잖아요.
죽으면 왜 끝이야 그다음에 계속된 연속된 천국의 삶이 있는 거죠.
연속되는 거죠.
그래서 과정이 인생이라는 거 잊지 마십시오 그래서 오늘 얘기하는 게 이 율법이 뭔지 아느냐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 백성 만드는 작업이야 그러니까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이유는 하나님이 사람 되게 만들려고 율법을 주신 거고 과정 속에서 성전을 주신 이유는 만나주시려고 그래서 성전의 본질은 만남이고 율법의 본질은
사람 되는 것 하나님의 백성 되는 것 그게 목적이다.
그런데 그게 뭐예요. 과정을 통해서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그런 거죠. 그래서 이걸 좀 더 세분해 본다고 그러면요.
과정에서는 우리 인간이 우리 수준밖에 못 누리잖아요.
그런데 하나님 수준에서 누릴 수 있기 위해서 필요한 게 뭐냐 기다림이라고
이거 좀 약간 여기서 약간 어려울 수도 있는데 그냥 여러분에게 이해할 수 있는 지혜를 하나님이 주셨으면 참 좋겠습니다.
미드라 쇼에 보면요. 이거 뭐 여러 번 들었을 거예요.
다윗왕이 금세공사를 불러다가 내가 승승장구하고 해도 교만하지 않고 교훈을 얻을 수 있는 것 내가 절망 중에 있어도 좌절하지 않고 힘을 얻을 수 있는 교훈 그런 걸 하나 써가지고 반지 하나 만들어 와 그랬다는 거예요.
맨날 며칠을 고민해도 답을 못 찾으니까 똑똑하다 그래서 솔로몬 왕한테 왕자한테 가서 물어봤대요 그랬더니 이 또한 지나가리라
그런 구절이 있죠. 이 또한 지나가리라 그래서 그 내용이 뭐예요.
우리가 기쁘다 뭐 승리했다. 승승장구 그래 봐야 그것도 순간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승리에 자기 마음 빼앗기지 않는 방법 이 또한 지나가리라 또 내가 어려움 당하고 실패하고 이제 내 인생 끝이야 좌절 속에 있다.
할지라도 이 또한 지나가리라
이게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얘기라는 거죠.
무슨 얘기예요. 인생은 과정이라는 거예요.
과정 속에서 붙들어야 될 게 뭐냐 우리는 성공 실패 이런 거에 관심을 갖는데 성공을 통해서도 사람 되어져 가는 거고 실패를 통해서도 사람 되어져 가는 거예요.
하나님 백성 되어져 가는 거예요. 되게 중요한 진리죠 우리 삶에서 벌어진 모든 여러 가지 현상들이 나를 하나님의 사람 만들어가지는 과정이다.
이거 이 또한 지나가리라 이게 중요한 개념이다.
이런 얘기죠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게 뭐예요. 이거 전체를 하나님의 눈으로 볼 줄 아는 눈 우리는 하나님보다 차원이 낫잖아요.
그래서 하나님 시각으로 볼 수가 없어 하나님 시간으로 볼 수 있는 힘이 뭐냐 하면 그게 기다림이라고 과정 속에서 기다림이라는 은혜를 받으면요.
하나님 시각에서 볼 수 있다라는 것입니다.
이거 여러분들 조금 더 젊은 이 같은 때 책 보고 좀 더 깊이 있게 보고하고 내가 참고 조사를 하나 소개해 줄게요 카를로 로벨리라는 사람이 쓴 책이 있는데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얼마 전에 나왔습니다 한 1 2년 됐어요.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이 책 내용이에요.
이게 뭐 상대성 원리 양자 역학 이런 거에 있어서 뿌리를 둔 얘기인데 그건 아침부터 얘기해 봐야 머리만 아플 거고 쉽게 얘기해서 우리는 1 2 3차원으로 살아가죠.
1차원이 뭡니까 선이에요. 선 2차원은 뭐죠 다 아는 얘기죠 면이에요.
3차원은 뭐죠 지금 같이 입체 x축 y축 z축 재축 이렇게 입체
근데 아이슈타인이 그런 얘기를 했잖아요.
4차원이 시간이라고 근데 우리는 그걸 잘 감지 못하죠.
4차원을 감지를 못해 그런데 뭐 아는 만큼 뭐가 있겠지 우리가 3차원으로 살고 있는데 그 다음 차원이 있겠지 뭐 이런 정도로 이해할 수 있겠죠.
그런데 이걸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가 지금 3차원에 살고 있으니까 입체를 살고 있으니까 우리보다 한 차원 낮은 2차원에만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한 번 생각을 해보자는 거예요.
2차원에 있는 사람은 면만 인식할 수 있겠죠.
면만
사과가 있습니다. 사과 사과를 우리는 사과를 입체로 이해하잖아요.
그런데 이 차원에 사는 사람은 사과를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이 뭐겠어요.
단면으로만 이해를 합니다. 그렇죠 이렇게 사과를 자르면 자른 단면 꼭대기를 자르면 꼭대기 단면이 보일 거고 중간 밑에 단면으로만 이해할 거라고 2 차원의 한계예요.
사과는 단면으로 잘라준 그걸 사과라고 그럴 거라고 자른 면만 이게 사과야
그런데 위쪽을 자다 보니까 또 싸운 부분도 있고 그래 이게 왜 어떻게 사과일 수 있어 이럴 거 아니에요.
2차원의 사람은 그걸 이해를 못할 거라고 그런데 이 모든 단면들이 다 쌓여서 동시에 보면 사과가 되는 거야 그럴 때 그걸 쌓인 단면이 어떻게 동시에 볼 수 있어 그러니까 2차원이지 동시에 볼 수 있는 게 3차원이 되는 거거든요.
똑같은 개념으로 시간도 그래요 우리가 과거 현재 미래
이거는 우리가 3차원이기 때문에 그 순서로만 이해를 하는 거예요.
근데 과거 현재 미래라는 게 우주에 나가 보면 시간이 없다.
그러죠 우리가 하늘의 별을 보는데 어떤 별은 1년 전에 보였던 별이야 이거 1광년 떨어진 거 어떤 별은 10년 전의 모습이에요.
1광년 떨어진 거 어떤 것은 천년 전에 있던 모습이에요.
천광년 떨어진 거 그게 지금 내 눈이라고 하는 그 단면에서 보이는 거죠.
진짜 실체가 아니고 그런데 그다음 단계로 올라가면 이 책에서 나오는 얘기예요.
우주 전체가 시간을 제외한 우주 전체가 한 덩어리라는 거예요.
우리 같이 3차원에 있는 사람만 과거 현재 미래를 보는 거지 이걸 동시에 볼 수도 있다는 거예요.
이게 상대성 원리라고요 이게 동시에 볼 수 있다고
이해가 안 되죠 예 근데 하나님은 이거 동시에 볼 거 아니에요.
그래서 예수님이 이렇게 봐요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또 뭐라고 그러는지 알아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그렇게 된 거 잃어보지 못하자 다 현재의 하나님이거든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이다.
그래서 여러분 영생이라는 게 뭐냐 하면 시간을 벗어났을 때 생명을 영생이라고 그래요 영혼이라는 게 그런 거예요.
시간 안에 놓여 있는 것을 벗어난 게 영혼이라고 그러니까 우리는 지금 뭔지 이해를 못하는 거야 그러니까 시간이 쭉 가는 게 영혼이 아니고 시간으로부터 벗어난 다음 차원을 영혼이라 그러는 거라고 우리가 부활하면 영혼 속에 살아갑니다.
영생 속에 들어갑니다. 우리 같이 2차원에서 그걸 이해를 못하듯이 3차원에 우리는 하나님의 차원을 이해를 못해요.
그런데 그걸 이해할 수 있는 게 뭐냐 기다림이라니까요.
기다림 잘 보세요. 우리는 성경에서 맨날 얘기하는 약속과 성취죠 하나님이 약속하고 시간이 지나고 난 다음에 성취하잖아요.
근데 예수님 말씀하시는 거 보면 못 느껴요.
약속이 곧 성취해요. 그거 모르세요.
약속한 게 곧 성취라니까 약속하시면 그대로 된 줄로 믿어라 그대로 된대 그 믿음은 기다림이라고 그래서 기다림이라는 것이 들어가면 우리는 감지는 잘 못하지만
하나님의 시각과 하나님의 태도로 받아들일 수 있는 시각이 열린다고 기다림이 그래서 약속은 곧 현실이야 빛이 있으라 그랬더니 말씀이 곧 현실이야 빛이 있었느니라 우리로서는 이해를 못하죠.
근데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그게 사실이라고요 그래서 이 땅을 살아갈 때
하나님 수준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걸 우리에게 뭐라고 그러냐 하면 계속 우리에게 얘기하는 게 그거예요.
믿음 좀 가져라 믿음 믿음의 눈 아니면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 너희 3차원에서 밖에 이해를 못해 하나님은 영적인 그걸 영적이라고 표현하기도 해요.
영적인 관점에서는 그게 아니거든 그게 다 동시야 동시 한꺼번에 다 이루어지는 거야 그러니까 우리 이해를 못하는 거야 예정론 같다고 이해를 못하는 거예요.
뭐 이미 다 정해졌다면 시간의 순서로만 보니까 그런 거지 하나님 앞에서는 그게 다 한 덩어리인 거예요.
덩어리인 거
그러니까 이걸 받아들이라는 거죠. 그때 꼭 필요한 게 뭐죠 인생에서 우리는 과정 그렇죠 과정 속에서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 가는 거야 그래서 이 땅에서 우리의 목적이 뭔 줄 알아요.
하나님 사람이 되는 거예요. 하나님 사람이 돼가지고 연속적으로 천국에 가는 거라고 그래서 천국 갈 때 어색하지가 않아요.
그냥 이 땅에서 할 일이 뭐죠 천국 백성들을 만드는 거예요.
그게 전도고 그게 증인 되는 거라고요
그래서 그걸 만들어서 죽음이라는 건너 보이거든 건너서 그냥 천국 가는 거예요.
쭉 그거를 하나님께서 우리 이 땅의 언어로 지금 설명해 주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믿음의 애무나라는 뜻이 뭐예요.
버티다 견디다 그런 뜻이라고 기다림이 포함돼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 가지고 믿음이 기다림이거든요.
믿음 가지고 잘 기다리면 묘한 게 하나님 말씀들이 이해가 돼
아 이거구나라고 깨우침이 돼요. 그리고 그것이 실제로 우리 삶 가운데 능력이 돼요.
그래서 하늘의 지혜를 가지고 이 땅을 살아가는 거예요.
하늘의 능력을 가지고 이 땅을 살아가는 거예요.
이 세상 사람들이 이해도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듣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보지 못것하는 것들을 보고 사는 거예요.
놀라운 일이죠. 우리 느끼고 살아가요 이 땅에 살면서 하늘의 능력과 하나의 영광으로 살아가는 거구나 그게 우리의 삶이구나 이걸 깨닫게 된다라는 것입니다.
그게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성령께서 여러분에게 깨우침이 있는 은혜를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오늘 스데반 설교를 통해서 스데반이 지금 굉장히 굉장한 설교를 하고 있는 거예요.
지금 고차원의 설교를 하고 있는 거예요.
지금 이 스토리 역사 스토리를 몰라서 또 얘기를 하겠어요.
이렇게 성경에 장하게 설명하는 게 아니라 성전에 대한 오해와 율법에 대한 오해를 그렇죠 이렇게 풀어주고 있는 거예요.
깨달으라는 거예요.
오늘도 만남을 통해서 생명이 주어지고 또 하나님 백성 되는 과정과 기다림을 통해서 하나님 백성으로 거듭나는 우리 거룩한 종 되기를 축원합니다.
자리에서 일어나겠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리 찬양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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