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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목사님 설교

전병욱 목사 - 사도행전 7장 17-43절 하나님이 지워 준 십자가를 끝까지 지는 사람

by 설교 나눔 2022. 3.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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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지워 준 십자가를 끝까지 지는 사람

전병욱 목사 -  사도행전 7장 17-43절   하나님이 지워 준 십자가를 끝까지 지는 사람 

하나님이 지워준 십자가를 끝까지 지는 사람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제사장 그룹이 스데반을 핍박을 합니다.

그들이 그들을 고소하면서 시비 걸었던 게 두 가지입니다.

성전과 율법입니다. 그래서 성전을 무너뜨리려고 그랬다 두 번째는 규례를 고친다고 그랬다 두 가지가 시비였습니다.

그래서 1절 보니까 이것이 사실이냐 이렇게 시비를 겁니다.

그 얘기를 듣고 스데반이 지금 설교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용은 뭐냐 하면 본질을 얘기하고 있어요.

성전의 본질과 율법의 본질 성전의 본질은 만남이다.

미팅에 있고 율법의 본질은 사람 만드는 데 있다.

거룩한 사람 하나님 백성 만드는 데 있다.

맨에 있다. 이렇게 두 가지를 설명하고 있다라는 것입니다.

오늘은 특별히 두 번째 율법의 본질을 살피겠습니다.

모세와 광야의 백성을 통해서 율법의 본질인

 

하나님의 사람 만드는 것이 어떤 것인가 어떻게 하나님의 사람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인가 이것을 살피도록 하겠습니다.

특별히 38절을 보니까 처음으로 광야교회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한번 38절 다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시내산에서 말하던 그 천사와 우리 조상들과 함께 광야 교회에 있었고 또 살아 있는 말씀을 받아 우리에게 주던 자가 이 사람이라

 

광야 교회 교회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에클레시아라는 단어입니다.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의 모임 그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는 거죠.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부르심을 입은 받은 사람들의 모임 이게 에클레이시아 교회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광야교회다 무슨 얘기예요.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들어 가신다 그런 얘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인생을 살 때 지금 광야 인생을 살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가고 계신다 그런 뜻입니다.

그래서 광야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람을 만드는 장소!

광야는 하나님께서 거룩한 백성을 만드는 장소 그게 광야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라는 것입니다.

우리 이 하나님의 사랑을 만드는 일에 있어서 오늘 두 가지를 얘기하고 있어요.

모세는 성공했고 하나님 사람이 됐죠.

 

그런데 백성들은 실패했다. 이유가 뭐냐 두 가지 단어로 설명을 하고 있는 것 같아요.

모세가 성공했던 그 모습을 보여주는 단어가 온유라는 단어예요.

온유 그리고 백성들이 실패했다. 그 단어가 뭐냐 완악함 완악

 

그래서 민수기 123절에 보면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그 성경에서 첫 번째 나오는 온유가 여기에 나옵니다.

그러니까 모세는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동이요 온유한 사람이었다. 거룩한 사람이 다 동요예요 그러니까 온유한 사람이 되었다.

반면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편 958절을 보니까 무리바에서도 그랬고 마사에서도 그랬고 그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지어다 이런 말씀이 나오거든요.

그러니까 그들의 특징이 뭐예요. 완악함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특징이 뭐냐 하면 온유함이 있어야 되고 또 반대로 표현한다 그러면 완악함이 없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온유 완화 이거 두 가지를 가지고 이 두 가지 리트머스 시험지를 가지고 하나님의 사람인지 아닌지를 판별할 수 있다.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먼저 두 갈식으로 도대체 그러면 온유한 사람이라는 게 뭐냐 완악한 사람이라는 게 뭐냐 그 뜻을 한번 살피면 온유라는 말은 하나님이 지어주는 십자가를 끝까지 지는 사람 이게 온유입니다.

 

히브리어를 아나브

그리고 거기다가 영어로 아이엠 같은 걸 붙이면 사람이 되거든요.

온유한 자 그러면 아나 빔이에요. 아나 빔 그래서 아나빔이라는 건 이게 게 고유 명사입니다.

그렇죠 온유한 자 동요가 거룩한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 백성 그런 뜻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뭐라고요 온유를 갖고 있는 건데 온유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지워주는 십자가를 끝까지 질 수 있는 사람이라고요

 

조금 전에 우리 찬양했던 339장 우리 젊은이들은 그런 표현을 잘 안 쓰기 때문에 그런데 내 몫의 태인 십자가 무슨 뜻입니까 내게 주신 내가 져야만 될 십자가가 있다라는 거예요.

그거를 끝까지 질 수 있는 사람 그걸 온유 이렇게 얘기한다는 거예요. 온유한 자

 

반면에 와낙은 무엇입니까 완낙이라는 것은 알면서도 일부러 마음을 닫아버리는 거 하자 크라는 단어인데

이게 바로 왕 때 제일 많이 썼죠. 옛날 성경에는 강팍하다 이런 말로 쓰고 완악하다라고 번역이 돼 있습니다 고집 부리고 마음을 닫아서 딱딱한 마음이 되어서 그 일부러 일부러 고의적으로 마음을 닫아버리는 거 이게 완악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백성은 어떤 사람이라고요 온유한 사람 하나님 백성은 완악함이 없는 사람 그게 하나님의 백성이다.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라는 것입니다.

 

먼저 모세를 통해서 어떻게 온유한 자가 되었는지를 한번 설명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설교가 디엘 무디가 오늘 이 본문을 설교하면서 모세의 일대기는 세 구분을 할 수 있다라고 설명을 했어요.

먼저 최초의 40년 첫 번째 40년은 자기 자신이 꽤 괜찮은 사람이다.

아이엠 섬바디 섬바디라고 생각했다는 거예요.

괜찮은 사람이다.

그리고 두 번째 광야에 있었던 40년 동안의 생활은 아무것도 아니죠.

그래서 아이엠 노바디 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다 그걸 깨닫게 되었고 80세에 하나님을 만나서 부르심이 있고 난 다음에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이니까 능력 있는 사람이죠.

그래서 아이엠 가스 바디 나는 하나님의 몸이다.

또는 뭐 하나님의 사람이다. 그런 식으로 묘사를 했어요.

저는 굉장히 의미 있는 묘사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모세를 온유한 자로 만들어 가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만들어 가십니다. 성공했죠.

우리도 이 광야 같은 인생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받는 우리 능력의 종 되기를 바랍니다.

 

먼저 첫 번째 단계를 한번 봅시다

그가 40세 될 때까지 그의 모습은 썸바디였어요.

아이엠 썸바디 꽤 괜찮은 사람이다. 이유가 뭐냐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 자랐죠.

그리고 애굽의 모든 학문과 지식을 다 배웠습니다.

그리고 웬만한 일들을 다 능하게 감당했다라고 성경은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다 보니까 내가 썸바디니까 꽤 괜찮은 사람이니까 나를 믿겠죠.

나를 의지한다고요 그래서 그는 자기 생각을 의지했습니다.

생각의 길을 갔다라는 거예요. 여러분 생각이라는 것은요 이게 사실은 가치 중립적인 것입니다.

마귀가 장난 칠 수 있는 아주 좋은 장소이기도 해요.

 

요한복음 132절을 보니까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다.

마귀가 유다의 가롯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다.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그러니까 내 생각 같지만 사실은 마귀가 집어넣은 생각입니다.

그러니까 마귀 뜻대로 끌려갈 수 있는 거죠.

그래서 너무 자신만만한 사람은요 자기 생각이라 그러면서 실제로 마귀의 종 노릇 할 때가 많이 있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생각의 길을 걸으면 안 되고 말씀의 길을 걸어야 된다는 거예요. 광야 미드바르 그랬죠 그렇죠 엠디비알 그거 연상되는 게 뭐예요.

디비알 다바르 말씀 광야는 말씀이 들리는 곳이라고요 그래서 생각으로 사는 곳이 아니라 생각을 다 내려놓고 다바로 말씀으로 사는 것이 광야입니다.

 

그래서 생각의 길이 아니라 말씀의 길을 걸어야 되는데 이때만 해도 철이 없으니까 내가 썸바이니까 생각의 길을 걸었다는 것입니다.

생각의 길을 걸으니까 누구 힘을 의지해요.

자기 손 자기 능력을 의지한다고요 자기 손과 자기 능력을 의지했더니 결과적으로 어떤 일이 벌어져요.

생각은 좋았죠. 자기 동족을 살려주겠다라는 생각을 가졌어요.

 

그리고 자기 손으로 뭘 했어 내 힘이 있다고 그랬는데 결국은 애굽 사람 죽이잖아요. 결국은 좋은 생각 플러스 말씀 없음이 합쳐지면 살인이 될 수밖에 없다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래요 생각이 좋다고 좋은 사람 아닙니다.

그 말씀 없으면 살인자로 끝날 수 있다라는 거예요.

 

23절부터 25절까지 내용을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시작 나이가 40이 되면 그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돌볼 생각이 나더니 한 사람이 원통한 일 담함을 보고 보호하여 압제 받는 자를 위하여 원수를 갚아 애굽 사람을 쳐 죽인지라 그는 그의 형제들이 하나님께서 자기의 손을 통하여 구원해 주시는 것을 깨달으리라고 생각하였으나 그들이 깨닫지 못하였더라 결국 실패하고 말았죠.

 

내 생각 내 힘 의지하면 잘 될 것 같은데 이 엉뚱한 데로 흘러가게 된다라는 것입니다.

그다음 날 동족이 히브리 사람들이 싸우는 것을 보고 야 형제끼리 왜 싸워 그랬더니 히브리 사람이 뭐라고 그래요 네가 우리 재판장이냐 너 어저께 애굽 사람 죽이던데 우리도 죽이라고 그러느냐 그 한마디를 듣고 발각됐다 그렇죠 들통났다 깨닫게 되죠.

잘 보세요. 자기 생각을 믿고 자기 힘을 믿는 사람이 얼마나 연약하냐 하면은 사람의 말 한마디에 우르르 무너져 버립니다.

말 한마디를 견디지 못한다는 거예요. 그 얘기 듣고 도주해 버니다. 도망쳐버립니다.

 

그러니까 호헌장담하고 힘 있게 얘기하는 것이 얼마나 연약한지를 깨닫게 되죠.

결국은 자기 힘 믿었던 모세 그 한순간에 무너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29절 다 같이 있겠습니다 시작 모세가 이 말 때문에 도주하여 미디안 땅에서 나그네 되어 거기서 아들 둘을 낳으니라

우리도 이 땅을 살아가면서 내가 썸바디라고 생각하면 내 생각을 합니다.

내 힘을 의지합니다. 그런데 한마디 말이 무너질 수 있다라는 거예요.

 

여러분이 잘 뛰던 사람이 어느 순간인가 뒤에서 지나가다가 누가 한 마디 수근수근 해버리죠 그 한마디가 가슴에 박혀서 그냥 그로기 상태에 빠지고 쓰러져서 일어나지 못할 때가 있어요.

낙심하고 좌절하고 심지어 사명도 떠나는 사람이 있다라는 것입니다.

왜 그래요 내 힘 믿었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썸바이라고 생각하니까 그러니까 진짜 연약하고 연약한 모습이 될 수밖에 없죠.

 

여기서 모세가 내가 썸바이라고 생각했던 근거가 뭐예요.

나 왕자라는 거예요. 애굽의 왕자 그렇죠 왕왕자라는 지위 나 실력 있다라는 거예요.

그렇죠 실력 있다. 나 배운 게 많다라는 거예요.

또 나는 의욕이 지금 충만하다는 거예요.

자신만만하다는 거예요. 힘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죠 한순간에 무너지더라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도 그랬죠 여기 있는 모든 사람이 다 주를 부인한다 할지라도 나는 주를 떠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부인하잖아요.

자기 생각과 자기 힘이 있는 것이 얼마나 연약한지를 보여주고 있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광야에서 제일 먼저 해야 될 일이 뭐냐 이 썸바디로 끝났다 인생 광야 40년 동안에 하나님께서 그를 어떻게 만들죠 가루로 만들어 버립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왕자로 있던 사람이 양모리 합니다.

양모리 목동 하고 그다음에 처가살이 40년 남자들 웬만하면 처가살이 안 하려고 그러잖아요.

그렇죠 강가 쓸개가 다 빠진다고 그러잖아요.

40년 동안 처가살이 하고 아무것도 아닌 종대입니다.

그 자기가 뭐예요.

노바디라는 걸 깨닫게 된다고 그래서 광야는요 깨지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온유한 자가 될 때의 첫 번째 단계가 뭐냐 하면 깨지는 거예요.

어느 정도로 가루가 될 정도로 완전히 깨지는 거 옛날 광고 생각나는데 진해 거담제라고 그러죠 그게 용각산 광고할 때가 있었어요.

막 흔들면서 이 소리가 아닙니다.

소리가 나서 이 소리도 아닙니다. 흔들어도 소리가 안 나거든요.

용각산는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1단계로 만들 때는 영적 용각산을 만드는 거예요.

그죠 다 깨져서 가루가 돼 버리면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그렇죠 완전히 가루가 되게 만들어 버리는 것

그래서 아이엠 노바디 이렇게 말하게 만든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광야는 풍화되는 시간이에요. 그죠 바람 불어서 다 풍화가 돼가지고 가로 돼 버리는 시간이고 그렇죠 자기 소리가 다 사라지는 시간이고 없다의 시간이 된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하나님께서 80세에 그를 찾아오셨습니다.

떨기나 불꽃 가운데 찾아오셔서 하신 명령이 뭐죠 신발 벗으라여 신을 벗으라

그렇죠 노바디 모세에게 신 벗으라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33절 다 같이 있겠습니다 시작 주께서 이르시되 내 발에 신을 벗으라 내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라 여러분 신을 벗는다는 뜻이 무엇이겠습니까 자존심을 내려놓는다 또는 나 자신을 내려놓는다 그게 뭐 깨졌다.

그런 뜻이에요. 깨졌다. 나 자신을 내려놓는다 그런 뜻이라고요.

여러분 신발은요 나 자신을 상징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신발의 의미

제가 학창 시절에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외국에서 운동화가 들어왔습니다.

나이키 뭐 이런 게 들어왔어요. 나이키 아디다스 이런 게 들어왔어요.

그 나이키가 제일 인기 있었어요. 근데 신발이 어떤 신발이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존재가 달라졌어요.

전 지금도 기억나요. 고등학교 때 같은데 체육 선생님이 우리 반에서 누구를 부르는데 야 나이키 신은 너 일로 와 그런다고 선생님이 신발밖에 안 봤어요. 신발에 나이키 시는 애가 우리 반에서 한 명이 없거든 그때 너 나이키 시는 애 나와 그랬더니 걔는 뭐 혼나러 나가는데도 불구하고 의기양양하게 나이키라고 그렇죠 그릇 나갔던 그런 모습을 보게 됩니다.

저는 기차표였거든요. 그래서 기차표 나와 그러면 또 범표 있었고 수준이 다 있었습니다.

또 짝퉁도 있었어요. 나이스도 있었고 프로 스포츠도 있었고 아디도스도 있었고 뭐 여러 가지 있었다고요 요즘에 뭐겠어요.

발렌시아가 구찌 이런 거 있더라고요 이게 사람들이 또 뭐로 바뀌죠 옷으로 바뀌고 차로 바뀌고 또는 집으로 바뀝니다.

여기서 신발이 뭐예요. 나이고 싶은 거예요.

그게 나이고 싶은 게 신발이라고 해요.

신을 벗으라는 게 뭐냐 하면 그게 나이고 싶은 거예요.

그 신하고 나하고 일치가 되는 거예요.

지금 되게 유치해 보이죠.

어린 청년들 보면 신발 갖고 저 난리를 치냐고 그러는데 나이 드신 분들은 그게 그게 자동차일 수 있는 거예요.

그렇죠 얼마나 좋은 차를 타고 다니냐 나이 드신 분 그게 집일 수 있는 거라고요 얼마나 좋은 집에 사느냐 그래서 여기서 말하는 신이라는 게 뭐냐 하면 그게 나이고 싶은 건 그거 벗으라는 거예요.

그죠 깨시라는 얘기죠 그거 아니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일도 할 수 없다라는 거예요.

 

광야라는 게 뭡니까

나이고 싶은 그것이 다 사라지는 곳이 광야예요.

오늘도 여러분 광야 생활을 하고 계시는 분 있습니까 사업이 어려울 수 있어요.

광야예요. 그렇죠 건강이 악화될 수 있어요.

내가 지금 뭐 제대로 몸을 가르지 못해요.

그게 광야라고요 풍화되는 거예요. 관계가 다 깨졌습니다.

실직했습니다. 실패했습니다. 사람들이 손가락질 한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그게 광야라고요 신발 벗은 거예요.

나이고 싶은 신발이 있다고요 나이고 싶은 신발 지금 sns 한번 들어가 보십시오 거기 보면 그 사람이 누군지 알 것도 없어요.

그 사람이 나이고 싶은 것들을 막 올려놔요 거기 보면 이렇게 되고 싶구나 잘 보면 허망하고 어찌 보면 유치할 수 있다라는 것입니다.

근데 그 모든 것이 다 사라지는 거 그 신발 벗는 거거든요.

 

그때 남은 게 뭐예요. 그게 진짜죠 그때 하나님이 남아 있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계시잖아요.

그거죠. 여러분 초대교회 얘기를 했죠.

 

초대교에 가장 많은 게 뭐라고 그랬어요.

역설적이지만 없는 것 초대교는 없는 게 많았어요.

그렇죠 조직도 없고 건물도 없고 권력도 없고 지위도 없고 없어요.

은과 금도 없고 초대교회는 제일 많은 게 없는 거예요.

뭐 없고 없고 없고 없고 다 없어요.

근데 오직 하나 있잖아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능력 일어나 거르라고 그러잖아요.

사도행전 36절에서

그죠 은과금은 내게 없으냐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준다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능력이죠.

그러니까 우리가 광야가 이런 거라고 다 깨지고 난 다음에 예수님 남는 거예요.

신발 벗고 난 다음에 예수님 남는 거라고요 다 가루가 되고 난 다음에 하나님의 능력만 남는 거라고요 그게 광야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데 광야로 안 보내시겠어요.

우리가 지금 보면 연세 드신 분들은 신발 갖고 난리 치는 사람 보면 웃기죠

 

우리 어떤 형제 신발 멋있게 생겨서 그거 얼마인 줄 알아 그랬더니 내가 놀랐어 200만 원이래 신발이 발렌시아가 그때 저는 부러운 줄 아십니까 목사님 부럽죠.

그러더라고 안 부러워요. 부러운 게 아니라 불쌍하더라고 나는 약간 유치해 보이더라고요 신발 200마리 자식 잘난 척 하고 저러나 뭐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어른들은 뭡니까

 

그게 나고 싶은 게 자동차일 수 있고 집이고 그런 거 아니에요.

그 수준 차이죠. 근데 하나님께서 그렇게 우리를 유치하게 놔둘 것 같아요.

신을 벗으라고 그러잖아요. 진짜 능력 진짜 생명 진짜 영원히 있는 하나님 붙드는 거 그렇죠 그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찾는 거야 광야는 하나님 말씀 듣고 하나님 만나는 장소가 광야라고요

 

제가 신학교 다닐 때 제 친구 한 명이 있었는데 이 친구는 공부도 잘 안 하는 것 같고 성실하지도 않은 것 같고 상당히 껄렁껄렁 했어요.

그래서 제가 신학교 또 부목사 할 때까지도 이렇게 교류를 나누고 그랬습니다.

근데 특이한 게 뭐냐면 이 친구는 사고를 많이 치거든요.

사고를 많이 치는데 이상하게도 일이 풀려요. 해결이 되고

그래서 배경을 잘 모르지만 하여튼 이상하더라고요 이게 문제가 생기고 사고를 치고 난 다음에 거기다 전화를 해요.

그리고 난 다음에 며칠 지나면 그 문제가 해결이 돼 있어 그래서 우리 친구들 사이에는 그래요 저놈이 속이고 있는데 저 아버지가 우리 교단 총회장 아니야 그런 생각했어요.

저 분명히 뒤에 백이 있으니까 저거 며칠 만에 저렇게 해결이 되는 거지 저렇게 쉽게 해결될 문제가 아닌데

 

목회를 하면서도 문제가 생겼거든요. 그때마다 전화 하면 또 해결이 되고 해결이 되고 그래요 제가 알고 봤더니 뭐 그렇게 총회장 아들도 아니고 집안의 유력한 가문도 아니고 그 전화를 어머니한테 한 거예요.

자기 어머니한테 어머니한테 전화를 하면 그 어머니는 아들이 전화가 오면 그 전화를 받고 곧장 금식 기도로 들어가요

 

곧장 3일 금식 기도를 한데 그냥 죽어라 기도하는 거예요.

그러면 그때부터는 아들의 문제가 아니라 이제 어머니의 문제예요.

나의 문제예요. 그리고 생명 걸고 금식하고 기도하고 하니까 그때마다 하나님이 응답해주셔가지고 풀리는 거예요.

유력자가 아니에요. 기도하는 어머니가 있었더라고 저는 그거 되게 부럽더라고 3일 동안 금식하는 어머니 그거 힘든데 저는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럼 내가 해버리고 말지 우리 친구들 다 그랬어요.

우리 직접 하나님이 계시는데

내가 내가 갖고 있으면 내 문제잖아요.

우리가 기도하고 하려면 하나님의 문제가 되잖아요.

그 하나님께서 풀어주시고 하나님이 능력 주시고 하나님이 승리 주시고 그게 광야에서 발견한 하나님이라고 여러분 내 힘 내 생각 믿고 의지하다 보면은 썸바디 그거 무너지는 겁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 볼 때 썸바디 느낌이 들면 그거 깨질 사람이에요.

근데 난 노바디에요. 노바디에요. 그렇지만 하나님 의지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다 바뀌기 때문에 아엠 가스 바비

그렇죠 굳이 뭐 설명한다면 하나님의 몸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렇게 고백할 수 있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게 능력 주시는 자라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그러잖아요.

 

베드로전서 57절에 보니까 다 죽게 맡기래요 뭐 염려부터 시작해서 다 죽게 맡기래요 주님께서 돌봐주신다 오늘도 내가 깨지는 시간이 광야의 시간인데 깨지고 난 다음에 주님께 다 맡겨서 승리를 이끌 수 있는 하나님의 종 되기를 바랍니다.

 

그다음에 이거 신발 벗으라는 두 번째 의미는 이런 것 같아요.

과거를 내려놓으라 과거를 내려놓으라 신이 이게 과거잖아요.

과거를 내려놓고 또 다른 말로 하면 미래를 붙들라 푯대를 붙들라 또는 이게 중요한 게 뭐냐 하면 부르심이죠.

부르심 따라 살라는 거예요. 이제까지는 뭐로 살았어요.

내 뜻과 내 원함을 갖고 살았잖아요.

이제는 부르심 갖고 사는 거예요. 그게 온유함이에요.

온유함은 첫 번째 깨짐 두 번째는 소명 한자는 소명인데 부를 소자에 목숨 명자잖아요.

부르시면 목숨 거는 거예요. 그게 소명이라고 주님이 부르신다고 그러면 내 목숨 걸겠습니다.

그게 소명이라고요 소명 갖고 사는 거 그게 온유한 자의 아나빔의 특징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과거를 단절해 버리고 이제 부르심이 뭐였어요.

나의 백성을 구출하라

그렇죠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출하는 게 부르심이 아니잖아 부르심 이게 소명이고 사명이잖아요.

거기에 충성하는 인생이 된다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그래서 하나님 만나야 그렇죠 온유한 자 돼야 여러분들이 부르심을 듣게 된다라는 거예요.

34절부터 36절까지를 읽겠습니다 시작

내 백성이 애굽에서 괴로움을 받음을 내가 확실히 보고 그 탄식하는 소리를 듣고 그들을 구원하려고 내려왔노니 이제야 내가 너를 애굽으로 보내리라 하시니라 그들의 말이 누가 너를 관리와 재판장으로 세웠느냐 하며 거절하던 그 모세를 하나님이 가시나무 떨기 가운데서 보이던 천사의 손으로 관리와 속량하는 자로서 보내셨으네 이 사람이 백성을 인도하여 나오게 하고 애굽과 홍해와 광야에서 40년간 기사 표적을 행하였느니라

 

지금 모세는 80세가 되었습니다. 나이 들었죠.

힘도 없고 가능성도 없고 기대도 없고 그런데 가장 약할 때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까 가스바디가 되니까 이제는 모든 것을 다 하고도 남더라는 것입니다.

구출하는 일이 가능하잖아요. 여러분 지금도 그래요 나 힘이 없어요.

난 나이가 너무 많이 들었어요. 나는 지금 옛날보다 가능성이 훨씬 없는데요.

그때가 기회예요. 그렇죠 하나님의 부르심에만 응답하면 여러분 지금부터 일하는 거래요 모세 이름이 건전함이잖아요.

 

이름 까 봐 준 거죠. 여러분 하나님의 이름 여러분 괜히 붙인 거 아니에요.

그 이름값 하라는 거예요.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져내는 부르심 가운데 있게 된다라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읽읍시다 온유가 뭐라고요 하나님이 지어주신 십자가를 끝까지 지는 사람 내게 주신 내 몫의 태인 십자가라고 그랬잖아요.

내 몫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끝까지 일 수 있는 거~

 

어떻게 끝까지 지죠? 부르심이 있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일단 깨졌기 때문에 두 번째는 부르심이 있기 때문에 그 길로 끝까지 가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게 온유한 자예요. 그게 거룩한 자라고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온유한 자가 되기를 원하신다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시편 37편은 별명이 온유한 자의 노래예요.

아나 빔의 노래 히브리 사람도 그렇게 불렀어요.

아나 빔 온유한 자거든요. 아나 빔 아나부가 있는 사람 온유가 아나 부

 

온유한 자 아나빔 노래 37장이거든요.

374절을 보니까 그 유명한 구절이 나오죠 예수님이 80에 나온 거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 여러분 그거 신기하지 않아요.

우리가 보통 아브라함에게도 약속했죠.

땅 주겠다. 근데 실제 땅 안 줬죠 막벨라 굴 외에는 무슨 땅을 줬습니까 땅도 안 줬죠 여기 땅을 해석을 잘해야 된다고 하나님께서 먼저 되기를 원하시는 것은 온유한 자가 되길 원하는 거예요.

온유한 자는 뭐예요. 하나님만 의지하는 자 하나님께 다 맡기는 자

 

그러면 땅은 뭐죠 약속에 대한 성취라고요 다 이루는 것을 주겠다.

그런 뜻이라고 땅을 주겠다. 하나님 나라를 주겠다.

하나님의 통치를 이루어지는 나라를 주겠다고 그러니까 땅 땅은 목표가 아니에요.

온유한 자가 되면 저절로 오는 게 땅이에요.

그래서 온유한 자가 되면 땅을 차지하게 된다.

 

온유한 자가 되면 다스리게 된다. 온유한 자가 되면 약속 받은 것을 다 성취하게 된다.

이 땅을 진짜 땅이라고 생각하지 말고요 성취라는 개념으로 받아들이면 됩니다.

그렇죠 이게 온유한 자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가져야 될 것들이 뭐냐 일단 깨져야 되고 부르심 깨진 자 그다음에 부르심이 있는 것~ 그게 온유한 자의 모습 그래야 끝까지 갈 수 있다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철저히 의지할 수 있었던 이유가 뭐냐 하면 과거를 내려놓을 수 있는 이유 하나님이 내 평생을 주관하셨기 때문에 그래요 과거를 한번 돌이켜 봅시다 먼저 17절 보니까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때 그래서 번성이 있다고 그러죠 지금 애굽에 있는 백성들이 막 번성하는 거 우연히 아니에요.

섭리예요. 섭리에 하나님께서 때가 되니까 번성하게 만드신 거예요.

그다음에 18절에 뭐라고 되어 있어요.

요셉을 알지 못하는 왕

악한 왕이 세워진 이유가 뭐예요. 우연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세운 거라고 막 핍박을 했어요.

아이들 다 죽이는 거 그때에 20절 보니까 모세가 낫다라고 얘기합니다.

여러분들 이렇게 아이들 다 죽이고 아들 죽이는 시대에 태어나면은 어두움 때잖아요.

이 때면 죽어야 될 거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빛을 비춰 주시니까 예수 우리들의 밝은 빛이죠.

빛을 비춰 주시니까 죽었어요. 살았어요.

 

갈 때 상자를 띄웠더니 바로의 공주가 마침 목욕을 하고 이거 우연 아니에요.

하나님이 이끄신 거죠. 아들로 삼고 교육받고 성장하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때 30절에 뭐라고 그래요 40년인 참에 이제 신의 산에서 가시나무 떨기에 불꽃 가운데 모세에게 보이셨다.

그러므로 크리스챤은

때를 아는 자다 이렇게 얘기해야 돼요 때를 아는 자 섭리라는 게 뭔지 아십니까 때 플러스 방법 방법과 때까지도 하나님께서 주관하신다라는 걸 믿는 거예요.

그게 섭리예요. 섭리예요. 여러분 인생에 우연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다 섭리하신 거예요. 인도하신 거라고요 그러므로 과거의 것을 다 주님께서 인도하셨다는 것은 해석이 된 거죠.

그러므로 미래의 삶에 대해서 신뢰할 수 있다라는 것입니다. 그게 부르심이에요.

깨지고 난 다음에 주님이 반드시 우리를 부르십니다.

이 부르심은 곧 뭐라고요 땅을 차지하게 된다고요 반드시 이루어진다.

이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그래서 그 길로 걸어가게 된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온유한 자의 세 번째 모습은 뭐냐 하면 순종이에요.

또 그래서 온유한 자 아나이은 세 가지라고 깨짐 부르심 순종

 

우리 인생이 왜 안 풀립니까 어떤 사람 안 풀리는 사람이 있어요.

이유가 뭐냐 온유가 약해서 또 다른 깨짐이 없어서 다 설명할 수 있죠 부르심을 못 들어서 그렇지만 십자가를 지는 능력이 약해서 그런데 다 이게 공통점이 뭐예요.

순종이 없어져요. 순종 아까 완악 얘기를 했죠.

완악 백성들이 완악했다라고 하는 거 완악의 해석을 다시 하면 알면서도 일부러 마음을 닫는 것

그래서 하자하크라는 말이 아낙인데 이건 바로 왕이 완악했어요.

일부러 불순종했어요.

그다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일부러 마음을 닫아버렸다고 그러니까 와낙이죠.

39절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죠.

39절 한번 다 같이 읽겠어요. 시작

우리 조상들이 모세에게 복종하지 아니하고자 하여 거절하며 그 마음이 도리어 애굽으로 향하여 여기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다.

그러니까 뭐예요. 고의적으로 고의적으로 안 들었다는 거죠. 그러니까 완악의 동의어가 뭐겠어요.

불순종 불순종 그렇죠 완악은 불순종이에요.

이건 뭐예요. 알아요.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안 하는 거예요.

제가 일전에 한번 설명을 했죠. 어떤 우리 형제가 있는데 이 형제가 되게 돈을 사랑하는 형제예요. 돈을 사랑하는 형제인데 제가 개인적으로 시킨 것도 아니에요.

어떻게 예배 드리다가 누구 얘기를 들었는지 십일조 생활을 시작했어요.

십일조를 안 내다가 십일조를 석 달을 냈어 저는 그걸 몰랐어요.

내가 뭐 십일조 하는 줄 알았는지 어떻게 알아 근데 저한테 이제 메일이 왔어요.

자기가 이렇게 은혜 받고 이제 십일조 생활을 하기 시작했다고

 

그다음에 이제 한참 잊어버렸는데 와이프한테 물어보니까 안 보여 그래서 교회를 안 나온대 요즘에 그래서 이유가 뭐냐 그랬더니 교회 가서 예배를 드리기만 하면 은혜를 받는데 그래서 안 나간대 이상하지 않아요.

아니 예배만 드리면 은혜를 받는 사람이 왔는데 왜 안 나오냐 그랬더니 교회 가기만 하면 은혜를 받아가지고 다시 십일조를 해야 되는 마음이 생긴대 그러면 11주 한번 집에 들어와서 너무너무 아까워서 잠이 안 오고 그래서 십일조 할까 봐 교회를 안 온대요 은혜 받을까 봐 교회를 안 온대요

 

이게 정확한 완악이라는 말 뜻이에요.

아시겠습니까 다 알아요. 하나님의 뜻인지도 알고 은혜도 받고 깨우침도 있고 근데 안 하는 거예요.

이런 거 있죠. 여러분 그런 거 몰라요 여러분들 뭐 남 얘기인지 아시나 내가 분명히 그 예배를 가고 싶은데 그 예배를 가면 내가 선교를 가야 될 것 같아 그래서 안 오는 경우 있었죠.

그런 거 없었어요.

내가 어느 모임 가기만 하면 거기서 하여튼 그거 순종만 하면 그다음에 뭘 해야 될 것 같아 그래서 슬슬 피해버리는 거 있죠.

그런 걸 뭐라 그래요 완악 완악 자기도 알아요.

의도적으로 안 하는 거예요. 결과를 알기 때문에 요나가 니네에 가서 복음을 증거하면 믿고 회개할 줄 알았어요.

그래서 고의적으로 안 해요. 거기에 쓰는 말이 뭐죠 하자크 와나

 

알면서 안 하는 거예요. 그러면 이 완악이라는 거 이게 뭐 별거 아니냐 절대 그렇지 않죠.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동안 광야 생활을 했잖아요.

그거 뭐 빠르면 2주면 갈 거리를 왜 40년 헤맸을까요.

이유가 뭐냐 이거예요. 새로운 세대 만들어내려고 거기서 애 낳아야 될 거 아니에요.

뒤집어 얘기하면 이 완악한 사람 다 죽이려고 40년이 왜 걸렸냐 하면은 완악한 사람 거기 남자 장교만 60만이잖아요.

그렇죠 나올 때 60만 명 여자 똑같은 숫자면 뭐 120만 명은 되겠네 그거 다 죽여버리려고 모세 여호수아 갈래 빼놓고는 완악한 사람 다 죽었어요.

그렇죠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마음을 닫은 사람들 그래서 완악한 사람 죽는 시간이에요. 광야

그래서 1세대들 다 죽이고 2세대들은 완악함이 없잖아요.

그렇죠 그래서 그 사람들은 이제 순종이 되는 사람이야 순종이 온유라는 건 순종이라고 말할 수도 있죠.

완악은 불순종이고 그래서 잘 보세요.

그들이 뭐 딴 거 배웠어요. 순종 배운 거지 그들은 깨질 것도 없죠.

광야에 태어났을까 깨졌고 부르심 뭐 이미 다 받은 거 아니에요.

태어날 때부터 순종만 배우면 돼요 순종 배웠습니다.

요단강 건너갈 때 어떻게 건너갔죠.

강이 갈라지고 난 다음에 간 거 아니에요.

들어가라고 그랬더니 순종했어요. 순종하고 들어갔다.

강 중심에 갔더니 갈라진 거죠. 요단강 순종으로 갈라진 거예요.

여리고성 첫 번째 열리고송이 있었죠.

하루에 한 바퀴씩 7 번째 날 7바퀴 돌고 소리 지르라 그리고 돌 때 말하지 말아라 여러분들 60만이 넘는 사람들이 말 없이 돈다는 게 쉬운 일이겠어요.

어떤 사람이 이거 지금 뭐 하는 짓이야

 

이거 지금 뭐 헛짓 아니야 저기서 공격하면 어떡하지 이런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 그때 안 하잖아요.

일사불란하게 안 하잖아요. 순종 훈련이에요 소리 지를 때 소리 지르잖아요.

순종 훈련이에요. 순종을 통해서 승리한 거죠.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한다 이런 얘기거든요.

1차적으로 깨져야 돼요 두 번째 부르심이 있어야 돼요 세 번째 순종하는 거예요.

 

그러면 요단강이 갈라지고요 여러 성이 무너지고 모든 것들의 승리의 승리를 맛볼 수 있는 거룩한 종이 된다라는 것입니다.

그걸 오주한 자 동요가 뭐라고요 거룩한 사람 또는 뭐 신약으로 말하면 성도가 되겠죠.

다시 한 번 이 마지막 이거 하나만 체크합시다.

 

거룩한 사람 그러다 거룩 구약을 평생 전공한 어떤 교수님 계시거든요.

그분 전공이 레위기에요.

레위기이니까 예배를 중심으로 레위기의 거룩이 제일 많이 나오거든요.

거룩 저는 여러분들 이해하기 편하게 학원식으로 설명을 했죠.

거룩이 뭐냐 그러면 이렇게 구별됨 그게 거룩이니까 다르다 다름이 거룩이다.

다른 사람 전부 다 놀러 다닐 때 우리는 다르게 예배드린다 다음 그렇죠 다른 사람 다 죄질 때 우리는 순종한다 다음 그래서 거룩은 다르다 예 맞습니다.

딱 일반적으로 듣기에는 맞는 얘기예요.

 

그러나 실체를 설명하기에는 좀 부족하죠.

하나님이 뭐냐 그럴 때 우상이 아닌 것 그건 아니죠.

우상이 아닌 게 하나님이다. 뭐 맞는 얘기지만 충분하지 않죠.

실체를 모르잖아 하나님의 실체를 남편이 뭐예요.

아저씨가 아닌 거예요. 그렇겠죠. 맞죠.

아저씨 내가 말하는 일반 아저씨가 아닌 게 남편이 맞지

 

그렇지만 아저씨들이 아닌 것으로 남편을 설명하기는 힘들잖아요.

실체를 알아야죠 그 교수님 얘기가 이거예요.

거룩은 정의 내릴 수 없대요 거룩은 개념화시킬 수 없는 큰 개념이래요 그러면서 설명해 주는 게 너무 멋진 설명인 거예요.

거룩이라는 게 뭐냐?

하나님의 백성이 우리들이죠.

하나님의 백성이 순종할 때 나타나는 결과 그게 거룩이래요 우리가 순종했을 때 나타나는 결과들이 있지 않아요.

아까 같으면 순종했을 때 요단강이 갈라지고 순종했을 때 열구성이 무너지고 순종했을 때 하나님 영광이 임하고 그렇죠 순종했을 때 어떤 하나님의 아름다움들이 막 나타나는 거 그런 모든 것들을 다 포괄하는 게 거룩이라는 거예요.

거룩 그래서 거룩은 아닌 것 같고 이렇게 더듬어 하는 게 아니라 이런 거 뭐라고 그러죠 맛보아 하려는 거예요.

체험에서 경험을 통해서 알라는 거예요.

언제 우리가 거룩을 알 수 있습니까 여기 앉아가지고 설명 듣는다고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 백성들이 순종함으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결과예요.

이건 순종한 사람만 알 수 있는 거예요.

 

요한보 2장에 나오잖아요.

물 떠온 하인들 말더라 순종한 사람만 알 수 있는 결과 그게 거룩이라고요 그래서 백성들은 그때 그 순종했던 종들은 거룩한 사람이겠죠.

순종했을 때 나타난 결과를 몸으로 알았기 때문에 그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 여러분들 율법 지금 시간에 하면 말씀이죠.

 

말씀이 외형적으로 뭘 하라 하지 말라 그걸로 우리를 준 게 아니고 하나님 사람 되라고 준 게 율법이에요.

하나님 사람 대라고 말씀을 왜 주셨냐 하나님의 사람 동료가 뭐예요.

거룩한 사람 근데 이게 우리가 이해하기 편하게 뭐라고요 온유라고 온유 예수님은 나는 온유하고 겸손하니 그러잖아요.

예수님 모습이에요.

온유한 사람만이 끝까지 내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고 갈 수 있습니다.

그때 나타난 결과는 어마어마한 결과죠 개인적으로는 영생이 있고 구원이 있고 부흥이 있고 다른 사람을 건져낼 수 있는 영광이 있습니다.

그게 그게 온유한 자의 삶이라는 거예요.

 

세 가지입니다. 깨져야 되고 부르심이 있어야 되고 순종이 있어야 됩니다.

그런 능력을 맛볼 수 있는 하나님의 거룩한 형 되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 지워 준 십자가를 끝까지 지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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